인산 김일훈 선생은 1909년 음력 3월25일 함남 홍원군 용운면에서 父彦陽 김씨 慶參과
母 江陵 劉氏 사이의 7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및 할아버지의 꿈에 하늘에서
신룡이 내려오는 꿈을 꾸고 낳았다 하여 이름을 雲龍이라 하였다.
아버지가 訓長으로 초빙되어평북 의주군 고령삭면 천마리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린 시절은
주로 그 곳에서 보냈다.

4-5세 무렵, 네 살 위인 누나가 당시 명의로 이름 높던 할아버지 冕燮으로부터 한글을 배우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한글을 自得한다.
그 뒤 옥편을 외우고 한글본 <춘향전> 한문본 <春香傳>을 읽은 뒤 이어서 漢文本 <明沙十里>
<忠烈傳> <三國志> <唐詩> <杜詩> <康熙字典>등을 차례로 독파했다.

말과 글에 눈 뜨면서 부터 인간과 우주의 제 현상을 비롯 질병의 유무와 치료약,
사람들의 禍福壽夭등에 대한 예지능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였으나 동네 사람들로부터
[귀신붙은 아이]로 오인 받아 금구령 속에 불우한 삶이 시작된다.

일곱 살 때인 1915년 여름, 비 개인 하늘의 5색 무지개를 보고 우주의 비밀과 藥理를 크게
깨우처서 공간 색소중의 약 분자 합성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병명조차 모르고 죽어가는 이웃의 수많은 불치, 난치병 환자들을 구료(救療)하기
시작하여 1991년 선화하시기 까지 많은 사람들을 병고에서 구제하였다.

16세 때인 1924년(甲子) 가을, 의주읍에서 친구들 4명과 함께 당시 횡포를 일삼던 일본인
아이 15명을 때려 눕히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서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모화산 부대(대장 변창호)대원으로 몇 번의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경(日警)에 쫓겨 소련,
백두산, 묘향산 등지로 20여년 동안 도피생활을 한다.
주로 공사판과 금점판, 심산 속을 전전하며 막노동, 사금 채취, 채약, 서당 훈장 등으로
연명하며 가는 곳마다 독특한 인술로 병든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묘향산 은봉의 금선대와 설령암, 강선봉의 강선암, 천마산의 영덕사 등지에서 숨어 살았는데
강선암에서 가장 오랜 기간 머물렀다.

1934년 봄, 철원 경찰서를 습격한 뒤 금강산에 숨어 있던 변창호의 부탁에 따라 철원으로
가던 중 금화군 금성면에서 얼굴 아는 조선인 일본형사 이희용(李熙龍)에 의하여 붙잡혀
3년형을 선고받는다.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년 6개월 되던 어느 날 작업 도중 탈출,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도피생활을 하는 동안 선생은 方漢岩, 宋滿空, 金水月, 강보살(이름 미상) 등 선지식들과 만나
도요(道要)를 문답하기도 하였다.

1942년부터 충제(充劑) 김두운(金斗運) 선생과 강제(康薺) 문창수(文昌洙) 선생의 주도하에
추진되던 총독부 습격 사건 계획에 참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주동인물들이 모두 체포됨에
따라 또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설령암. 강선암에 은거한다.

김두운, 문창수, 김형로, 최니학(최용건의 부)이 주동인물로 검거되어 사형이 확정돼 문창수
형제와 최니학은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김두운과 김형로는 45년 8월 17일 사형되기로
예정되었다가 8월15일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광복 직후 松雲 방주혁 선생과 김규식 박사댁에 머물며 송진우, 김성수, 김범부, 정인보,
장덕수, 김준연, 조병옥, 김병로등과 종유하며 국사를 의논한다.

백성욱 박사와 세 차례 비밀리에 만남을 갖고 강연사변(6.25)에 대한 대비책을 수립했으나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있던 白박사의 진언이 묵살됨에 따라 좌절되고 만다.

이에 앞서 48년 정부 수립 직후 월남 공사를 지낸 최영호 선생과 3.1운동 때 33인의 한 사람
인 이명룡 선생의 인도로 경무대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 한의학과 양의학의 장점을 살
린 종합병원 건립과 한의과대학 설립, 방역의 한방이용 등을 건의했으나 보건책임자인 미국인
고문의 반대로 실현을 보지 못한다.

당시 정계를 좌우하던 많은 정치지도자들을 차례로 만나보고 나서 실망, 계룡산 백암동으로
낙향하여 오핵단등 암약 실험과 글방 훈장, 산판, 목물등으로 생활한다.

공주군 마곡사 부근과 논산군 상월면 상도리 등지에서 은거하던 중 은진에 있던 최영호
선생으로부터 이 대통령이 만나고 싶어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 대통령으로부터 함 부통령을
도와주라는 당부를 받는다.

함태영 부통령으로부터 삼일정신선양회(총재 함태영, 부총재 김병로)의 전국 조직을 맡아
이뤄달라는 부탁을 받고 사절했으나 거듭된 간곡한 부탁에 의하여 선양회의 조직을 마치고
경남 함양의 지리산 기슭으로 낙향, 함지박을 만들면서 5년여 은둔 생활을 한다.

61년 5.16무렵 상경하여 친지들의 집에 머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병을 치료해 준다. 이때 쑥뜸으로 광나루 모 절의 소경 어대사(魚大師)의 눈을 뜨게 하는
치료에 성공한다.

당시 48세의 어대사는 17세때 열병을 앓다가 시신경이 끊어져 소경이 된 이래 30여 년 동안
절에서 부처님께 다시 눈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으나 영험이 없자 좌절해 있던
참이었다.

절에 온 기도객으로 부터 묘향산의 활불이 서울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물어물어 찾아와
[영구법(靈灸法)]에 대한 가르침을 들은 뒤 40일 동안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며 뜸을 뜬 끝에
시력을 회복, 잃었던 광명을 되찾은 것이다.
魚大師는 그 뒤 10여년 동안 7명의 소경을 손수 뜸으로 고쳐 주고는 58세되던 해 생을 마쳤다.

이 무렵 소문을 듣고 아들과 며느리를 보내온 마포의 어느 할머니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는데
자신의 눈도 보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청하여 이에 뜸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할머니는 단 하루만 살아도 좋으니 꼭 눈을 보게 해달라고 졸라대어 부득이 또 영구법을
일러준 것이다. 그 할머니는 단 한 번만이라도 밝은 세상을 보고 싶은 일념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뜨더니 마침내 40일 만에 기적적으로 광명을 되찾았다.

서울과 부산에서 성혜 한의원과 세종 한의원 원장 및 고려 한방병원 고문 등을 맡아 난치병
치료를 전담하다가 81년 12월말 경남 함양으로 낙향하여 자신의 영세 후에 공개할
[신약본초]저술에 몰두하였다. 해방 이후 결혼하여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인산(仁山)]이라는 호는 독립운동시 묘향산 등 명산에 은거하며 인술로 활인 구세(活人救世)
의 이적(異蹟)을 보였다 하여 석계(石溪) 문빈(文彬) 선생과 희산(希産) 이승학(임시정부
독립신문 사장 겸 주필) 선생, 充濟 김두운(평북의 大儒)선생등이 붙여준 호이고, 일훈(一勳)
이란 이름은 해방 후 스스로 개명한 것이다.

구한말 의병대장 유인석(柳麟錫) 선생의 제자인 김두운 선생의 문인으로서,
해방 직후 華西 선생의 손자인 이광암 선생에게 역비전(易秘傳)과 중용도간(中庸圖看)
등을 전수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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