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がんと共に働く ~ 家族編 「がんは“生きる”と向き合うプロジェクトです」 ― 映画監督 砂田 麻美 氏

がんは、患者本人だけの病ではありません。 家族みんなが当事者になり得ます。 患者さんが「がんと共に働き、生きる」ためには、 家族の役割分担が欠かせません。 では、家族は、どう身内のがんと向き合い、どうサポートすればいいのか。 例えば————。 がんをきっかけに 患者さんが「よく生きる」ためのプロジェクトとして 家族みんながチームのように役割分担をしながら サポートする。 今回登場するのは、 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エンディングノート」の監督、砂田麻美さんです。 映画は、 末期がんと診断された砂田さんのお父さまが、 死後の後始末について「エンディングノート」を家族にしたためるところから始まります。 そんなお父さまと、ご家族やご友人とが一緒に過ごす かけがえのない時間。 「死」と向き合うことで、むしろ「生きる」ことを真剣に考える。実行する。 大ヒット映画の舞台裏でもある砂田さんとご家族のご経験から、 がんと家族と人の死と生について、砂田さんと一緒に考えてみましょう。

01 家族が、がんと出会うとき

2009年5月、68歳の父が胃がんと診断されました。 少し前に40年以上勤めた会社を退職し、第2の人生を楽しみはじめた矢先のことでした。 毎年受けていた健康診断で胃に異常が見つかり、精密検査を受けたところ、 肝臓に転移したステージIVの進行胃がんであることがわかったのです。

映画『エンディングノート』より主人公の父と孫達 ©「エンディングノート」製作委員会

 私がはじめて監督した『エンディングノート』は、主に私の父が胃がんを宣告されてから亡くなるまでの半年間を追いかけた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です。

 がんを告知された父は、それから間もなく、葬儀やお墓の話、財産分与など、自分の亡くなったあとのことについて、家族に「具体的な覚え書き=エンディングノート」を書き始めました。

 映画では、父が書いた「エンディングノート」の内容をモチーフにしながら、がんにかかった父が、家族や、友人や、自身の人生とあらためて向き合うさまを描き、予想以上に多くの方に観ていただきました。

 父は、がんを告知されてから半年で亡くなります。闘病期間は長くはなかったけれど、私も、家族も、父のがんと向き合って、いろんなことを悩んだり、いろんなことを感じたり、結果として、いろんなことを知りましたし気づきました。

 最初、父ががんにかかっていることを知ったとき、正直にお話しすると、ピンとこなかったんですね。「お父さん、がん? あの、がん?」という感じで。リアリティーがない、というか。私だけじゃなくて、家族も、父自身もそうでした。

 父がはじめに異変に気づいたのは、定期的な健康診断でした。

 2009年の5月のことです。

 胃に影が見つかって、あらためて精密検査を受ける、ってことになったんです。このときは、父も家族もさほど気にしている様子はありませんでした。毎年検査を受けていたし、これまで何の異常も見つかったことはなかったですし。ですから、精密検査の結果が出たときも、たぶん何でもないだろう、と思っていて、そのときは父がひとりで病院に行きました。

 そこでいきなり「胃がんです」って診断が下ったんです。じゃあ、そこで父ががっくり落ち込んだり、診断結果を父から伝えられた私たち家族がパニックになったりと、テレビドラマみたいな展開があったかというと、そんなことはなくて、なんだか他人の話を聞いているような感じでした。

 今にして思うと、あまりに唐突な出来事だったので、何十年もずっと一緒に暮らしていた父が突然がんになった、ということに実感がわかなか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もしかすると、父本人もそう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ただ、そこでぼんやりしていたわけじゃなくて、すぐにがんの治療に対する行動は起こしました。

 まず、診断を下したのとは別のお医者さまの意見を聞こう、ということになりました。セカンドオピニオンですね。やっぱり複数の意見を聞いたほうがいい。父は当初、セカンドオピニオンをお願いすることに必ずしも前向き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病院や先生に対して失礼だという思いが強かったんだと思います。けれどそこは、子供たちが強く勧めたことによって、最終的に父も納得しました。

 そうして父が最初にがんの告知を受けてからセカンドオピニオンを聞くまでの間くらいから、家族の中で、何となくですが、いくつか方針が決まっていったんです。

 まず父の診察には、必ず誰かが付き添うこと。父ひとりでは病院に行かせないこと。

 なにかを判断しなくちゃいけないとき―――例えば、どの治療法を選びますか、入院しますか、それとも通院で対応しますか、という判断に迫られたときって、家族が一緒にいたほうがいいだろうし、迷ったり不安になったりするのも、ひとりじゃないほうがいいだろうとも思ったんですね。

 誰かが必ず付き添っていく、というのには、もうひとつ目的があって、それは、父のがんに関する情報は家族で徹底的に共有しておこう、そのためには、父以外の誰かがいつも直接病院での話を聞いておこう、ということでした。このとき、兄の家族が海外赴任をしていたこともあったので、家族での情報共有はとても重要だったんです。

 あとは、役割分担ですね。私は調べもの担当。こういうのは、性格が出るので、それぞれの性格に応じて、結果として役割が決まっていったわけで、誰かが指示を出して、あれをやれ、これをやれ、と決めたわけじゃないです。

 そんな具合に、家族がチームみたいなかたちで、けれど自然な流れで父のがんと向かい合おう、という感じになっていきました。

 セカンドオピニオンを求めたお医者さまからの診断結果を聞く日は、家族全員が同席できることになりました。このときは、まだ、どの程度の進行具合か、正確なところはよくわかってなかったんです。

 結果は、ステージIVでした。手術は不可能で、かなり進行した状態、とお医者さまから告げられました。父のがんは、思っていたよりずっと深刻でした。

 このときも、父自身が動揺したり、様子が変わったりしたかというと、少なくとも私たちと一緒にいるときには、そういう姿を見せなかったですね。

 父は68歳の戦中生まれなんですが、あの世代の男性って、自分がいまどう感じているかといった心理状態を家族にしゃべったり、感情的になったり、ということがあまりないような気がするんです。父もそうでした。エンディングノートを書き始めたのも、このステージIVの告知を受けた、少しあとでした。

 ステージIVと聞いて、父のがんが思ったより進行しているってことにあからさまなショックを受けたのは、むしろ私や母や姉や兄、家族のほうでした。

 最初に「がん」と聞いたときは、ピンときてなかった私たちも、セカンドオピニオンで、手術ができないほど進行している、と聞かされたときは、さすがに深刻になりました。はじめて当事者になってしまったような感じで。

 でも、当人でもないのにショックを受けたまま、というわけにはいかないし、なんとかベストを尽くしたいと思いましたから、そのあと徐々に、家族それぞれが、取りあえずできることをやろう、という雰囲気になっていきました。

 まずは、とにかくがんという病気について徹底的に調べよう、それでちゃんと知ろう、と。本を買ったり、インターネットを検索したりしながら、がんの状況、病院の選択、治療法の種類などなど、がんに対する情報を集めていきました。こうやっていろいろ調べるのは、もっぱら私の役目でしたね。これはもう性格で、「知らない」「わからない」というのがいちばん怖かったんです。

 セカンドオピニオンの結果を聞きに行くときも、試験勉強みたいに、ノートに必要事項をびっしり書き出して、お医者さまがお話しされている内容がどの項目にどう対応しているのか、ひとつひとつチェックしていました。

 私にしても、母にしても、姉にしても、海外にいる兄にしても、それぞれ性格や得意なことは違うわけで、それぞれの性格の素直な方向で、がんにかかった父をフォローするしかない。逆にそうしていくしかなかったんだなと、振り返ってみて、そう感じます。

III 암과 함께 일하며 ~ 가족 편 「암은 "산다."는 것과 마주하는 프로젝트이다」 - 영화감독 스나다 마미씨

암은 환자 본인만의 병이 아닙니다. 가족 모두가 당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환자가 "암과 함께 일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족의 역할 분담이 불가결합니다. 그럼, 가족은, 어떻게 몸속의 암과 마주(대결)하며, 어떻게 지원하면 좋은 것인가. 예를 들어~. 암을 계기로 환자가 「잘 살기」를 위한 프로젝트로 가족모두가 팀과 같이 역할분담을 하면서 지원한다. 이번에 등장하는 것은,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노트"의 감독, 스나다 아사미 씨입니다. 영화는, 말기 암 진단을 받은 스나다 씨의 아버님이, 사후 처리에 대해 '엔딩 노트'를 가족에게 맡기고자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아버지와 가족이나 친구들이 함께 지낸다는 둘도 없는 시간 "죽음"과 마주봄으로써 오히려 "산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실행한다. 대히트 영화의 무대 이면이기도 한 스나다 씨와 가족의 경험으로부터, 암과 가족과 사람의 죽음과 삶에 대해서, 스나다 씨와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가족이 암과 만날 때

2009년 5월, 68세의 아버지가 위암이라고 진단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에 40년 이상 근무한 회사를 퇴직하고 제2의 인생을 즐기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매년 받고 있던 건강진단에서 위에 이상이 발견되어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간으로 전이된 4기의 진행성 위암인 것을 알았습니다.

영화 「엔딩 노트」보다 주인공인 아버지와 손자들 © 「엔딩 노트」 제작위원회

 내가 처음 감독한 「엔딩 노트」는 주로 우리 아버지가 위암을 선고받고 돌아가실 때까지의 반년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영화예요.

 암을 선고 받은 아버지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장례나 묘소 이야기, 재산분할 등 자신이 돌아가신 후 그 일에 대해 가족에게 구체적인 「각서를 쓰기 = 엔딩 노트」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쓴 「엔딩 노트」의 내용을 모티브로 하면서 암에 걸린 아버지가 가족이나 친구나 자신의 인생 등 새로운 모습을 그려서,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보아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처음 이변을 감지한 것은 정기적인 건강진단이었습니다.

2009년의 5월의 일입니다.

위에 그림자가 발견되어 재차 정밀 검사를 받는 셈이 되었습니다. 이때는 아버지도 가족도 그다지 신경을 쓰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매년 검사를 받았으며, 지금까지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고요. 그래서 정밀검사 결과가 나왔을 때도, 아마도 아무것도 아닐 거라 생각하였고 그 때는 아버지가 혼자서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위암입니다'라는 진단이 났습니다. 그럼, 거기에서 아버지가 의기소침하거나, 진단결과를 아버지에게서 전해들은 우리 가족이 공황상태에 빠지거나, TV드라마 같은 전개가 있었는가 하면, 그런 일은 없었고 무언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돌연한 일이라 몇 십 년 동안 쭉 같이 지내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암에 걸렸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아버지 본인도 그랬을 지도 모릅니다. 단지, 거기서 멍하니 있던 것은 아니고, 바로 암의 치료에 대한 행동은 일으켰습니다.

우선, 진단을 받은 것과는 다른 의사의 의견을 듣기로 했습니다. 세컨드 오피니언이네요. 역시 복수의 의견을 듣는 편이 좋다. 아버지는 당초 세컨드 오피니언을 부탁하는 것에 반드시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어요. 병원이나 선생님에게 실례라는 생각이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곳은, 아이들이 강하게 권한 것에 의해, 최종적으로 아버지도 납득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처음 암에 대한 고지를 받고 나서 세컨드 오피니언을 들을 때까지 그 동안에 우리 가족 중에서 왠지 모르지만 몇 가지 방침을 정하셨어요.

우선 아버지의 진찰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동행하는 것. 아버지 혼자서는 병원에 못 가시게 하는 것.

무언가를 판단해야 할 때---예를 들면, 어떤 치료법을 선택할까, 입원할까, 그렇지 않으면 통원으로 대응하는가? 라는 판단을 해야 할 때는, 가족이 함께 있는 것이 좋을 것이고, 헤매거나 불안해하거나 하는 것도, 혼자가 아닌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누군가 반드시 같이 가자고 하는 데는, 또 다른 목적이 있는데, 그건, 아버지의 암에 관한 정보는 가족끼리 철저히 공유해 두자,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 이외의 누군가가 언제나 직접 병원에 나가 이야기를 들어 두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형의 가족이 해외부임을 하고 있던 것도 있고 해서, 가족 간의 정보 공유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나머지는 역할분담입니다. 나는 조사 담당이었다, 이런 것은 성격이 드러나기 때문에 각각의 성격에 따라 그 결과로서의 역할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누군가 지시를 내리고, 저걸 해라. 이것을 하라고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상태로, 가족이 팀 같은 모습으로, 그래도 자연스런 흐름으로 아버지의 암과 마주보자, 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컨드 오피니언을 요구 받은 의사들의 진단 결과를 듣는 날은, 가족 전원이 동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아직, 어느 정도의 진행 상태인지, 정확한 곳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결과는, 4기였습니다. 수술은 불가능해서, 꽤 진행이 된 상태라고 의사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암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이 때도, 아버지 자신이 동요하거나 상태가 바뀌거나 하면 적어도 우리와 함께 있을 때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요.

아버지는 68세로 이차대전 중에 태어났지만, 그 세대의 남성은, 자신이 지금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라고 하는 심리 상태를 가족에게 이야기하거나 감정적으로 되거나 하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도 그랬어요. 엔딩 노트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4기의 고지를 받은 조금 뒤였습니다.

 4기라 듣고, 아버지의 암이 생각보다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노골적인 쇼크를 받은 것은 오히려 저나 엄마나 언니나 형과 가족이었습니다.

 처음에 암이라고 들었을 때는 잘 몰랐던 우리도 세컨드 오피니언으로 수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역시 심각해졌습니다. 처음 당사자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으로.

 하지만 당사자도 아닌데도 쇼크를 받은 채로, 라고 할 수 없을 뿐더러, 그럭저럭 최선을 다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후 서서히, 가족 각각이, 우선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분위기가 되어 갔습니다.

우선 암이라는 병에 대해 철저히 알아보자고, 그래서 제대로 알아보자고. 책을 사기도 하고, 인터넷 검색도 하면서 암의 상황과 병원 선택, 치료법 종류 등 암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갔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조사를 하는 건 전적으로 제 역할이었어요. 이것은 이미 성격으로, 「안다」 「모른다.」라고 하는 것이 가장 무서웠습니다.

 세컨드 오피니언 결과를 들어보러 갈 때도 시험공부처럼 노트에 필요사항을 잔뜩 적어내고, 의사가 말씀하시는 내용이 어느 항목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일일이 체크하고 있었습니다.

 나로서도, 엄마든, 누나든, 해외에 계신 오빠든지, 각각 성격이나 자신 있는 것은 다르고, 각각의 성격의 솔직한 방향으로, 암에 걸린 아버지를 추적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렇게 해나갈 수밖에 없구나 하고 되돌아보니, 그렇게 느낍니다.

02 がんと「闘う」から、がんをきっかけに「よく生きる」を

ある日、人生に“限り”がある、という当たり前の事実を突きつけられたとき、 「後悔したくない。だからこそベストを尽くそう」と思いました。 がんに立ち向かうことは「死に向かうプロジェクト」ではなく、 本人が、家族が、最期のその日まで「よく生きる」ためのプロジェクトなんだろうな、と。

 今にして思うんですが、父と私たち家族が、父のがんに向き合った半年間は、決して「死に立ち向かう」という感じじゃなかったなあ、と。

 がんになった、ということで「死」というのを強烈に意識すると、かえって、毎日毎日をちゃんと生きるってどういうことなんだろう、というのを確かめていくようになっていく。がんと向き合うというのは、例えて言うと、「よく生きる」っていうことを家族総出で挑戦するプロジェクトみたいなものでした。

 がんの告知、特に父がそうだったように「手術不可能です」というステージIVの告知、というのは、戦争の赤紙が突然舞い込んできたみたいな感じだと思うんです。

 「人生には限りがある」「人はいつか必ず死ぬ」という、すべての人間にとって当たり前の、でも、普段は考えない、考えたくない事実を、いや応なしに突きつけられるわけで。

 父ががんを告知されたことで、父はもちろんですが、私たち家族も「死」というものを強烈に自覚させられました。同時に生きることの価値についても、はっきり考えるようになったんです。

 とにかく後悔だけは絶対したくない。できることは、全部やろう。そんな気持ちが、私たち家族と、そしてもちろん父のモチベーションに、いつしかなっていきました。

 そうなると、がんへの向き合い方もいろいろ変わってくるんです。

 がんになってしまうと、どうしても闘病と治療だけがすべてのような気がしてしまうんですが、がんにかかった父からすれば、闘病と治療だけが自分の人生の残された時間じゃないわけです。ちゃんと歩けるし、考えることも、ご飯だって食べられる。

 だったら、治療以外の時間を、「よりよく生きる」ために使うほかないんだと。だからよく父は「QOL(Quality of life)」という言葉を口にしていました。

 そうすると、私たち家族にとっても父と過ごす一日一日の時間がとても貴重に思えてくるんですね。むだな時間なんかないなあ、と思えてくるんです。

 限りある人生をどう過ごすか。いまできること、いまやっておきたいことは何だろう。いま会っておきたいひとは誰だろう。とにかく、できること、ぜんぶやってあげたいな、って。家族みんなでそう思って、いろいろ試行錯誤していると、ああ、家族ってひとつの共同体なんだなあ、と自覚しました。

 私自身もいろんなことをいやでも考えさせられました。父ががんになる前と後では、考え方もいつのまにかずいぶん変わったなあ、と思うところがいくつもあります。

 人の人生っていつか終わっちゃう、限りのあるものなんだ、っていう、当たり前のことを、自分ごととして突きつけられた。

 人間ひとりの人生なんてせいぜい70年とか80年とかで、地球ができて生命が誕生して数十億年だかの気が遠くなるくらい長い時間と比べると、ほんとに一瞬、あっという間でしかないのに、なんで生きているのってこんなにしんどかったりするんだろう、人間の生きている意味って何なんだ、って思ったりするわけです。

 でも、そこまで考えているうちに、私なりに思い至ったりするんですね。

 どうせ宇宙から見れば、人の一生なんて一瞬なんだから、「人生の意味」なんかを考えたり悩んだってしょうがない、とにかく自分の最期の日まで、ちゃんと生きてればいいんだろうな、きっと……みたいな感じに。同時に人ってただそこにいるだけで、別の誰かになにかしらの影響を及ぼしている、ってことにもあらためて気づいたんです。もちろんいい影響もあるし、悪い影響もある。だったら、自分が生きている限りは、自分とちょっとでも関係している周りの人に、なんでもいいから、いい影響を少しでも手渡せるといい。それがちゃんと生きる、よく生きるってことかな、と。

 父のがんに寄り添っていたら、本当に普段考えないことを考えさせられたんです。誰かの死に直面しないと、人間、ほんとの意味では気づかないし、考えないものなんですね。

2. 암과 「싸우기」 때문에 암을 계기로 「잘 살기」로

어느 날 인생에는 "끝"이 있다. 라는 당연한 사실을 들이받았을 때, 「후회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암에 직면하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프로젝트」가 아니고, 본인이, 가족이 마지막인 그날까지 「잘살기」 위한 프로젝트일 것이라고.

지금에 와서 생각하지만, 아버지랑 우리들 가족이 아버지의 암과 마주한 반년 간은 결코 「죽음에 맞선다.」는 느낌이 아니었다는 걸.

암에 걸렸다, 라고 하는 것으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강렬하게 의식하면, 오히려, 매일 매일을 제대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라고 하는 것을 확인해 가게 되어 간다. 암에 맞선다는 것은 예를 들어 말하면, 「잘 산다.」는 것을 가족 총출동으로 도전하는 프로젝트 같은 것이었다.

 암의 고지와 특히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수술 불가능합니다.」라는 4기의 고지, 라는 것은 전쟁의 빨간색 종이가 갑자기 날아온 듯한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라고 하는, 모든 인간에 있어서 당연한, 하지만, 평상시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동시에 산다는 것의 가치에 있어서도 확실히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암을 알리자 아버지는 물론이고 우리들 가족도 「죽음」이라는 것을 강렬하게 깨닫게 됐습니다. 동시에 산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도 분명히 생각하게 된 겁니다.

 아무튼 후회만은 절대 하고 싶지 않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그런 기분이 어느새 우리 가족은 물론 아버지의 동기로 변해갔습니다.

그렇게 되면, 암을 대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바뀌게 됩니다.

암에 걸려버리면 아무래도 투병과 치료만이 전부인 것 같이 되어버리지만, 암에 걸린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투병과 치료만이 자신의 삶의 남은 시간일 수가 없다. 제대로 걸을 수 있고, 생각하는 것도, 밥도 먹을 수 있다.

 그렇다면 치료 이외 다른 시간을 「더 잘 살 수 있도록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아버지는 삶의 질(Quality of life)」이라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우리들 가족에게 있어서도 아빠와 함께 보내는 하루하루가 참 귀하게 생각나네요. 헛된 시간이 도대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정된 인생을 어떻게 보낼까. 지금 할 수 있는 일, 지금 해두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지금 만나두고 싶은 사람은 누구일까. 어쨌든, 할 수 있는 것, 전부 해 주고 싶어, 라고. 가족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하고 있으면, 아, 가족은 하나의 공동체구나, 라고 깨달았습니다.

 제 자신도 여러 가지를 싫어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암에 걸리기 전과 나중엔 생각이 어느새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구석이 몇 가지나 있어요.

 사람의 인생은 언젠가 끝나 버리는, 한계가 있는 것이라는, 당연한 일이, 자신에게 닥쳐왔다.

 인간 한사람의 인생이란 건 기껏해야 70년이라든지 80년으로 지구가 생겨나 생명이 탄생해 수십억 년이라든가 하는 생각이 멀어질 정도로 긴 시간과 비교하면 거의 한 순간, 순식간 밖에 안 되건만 어째서 살아 있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걸까라고 아아 가족이란 하나의 공동체네, 라고 자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제 나름대로 생각이 미치거나 하네요.

어차피 우주에서 보면, 사람의 일생이란 건 한순간이니까,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을 생각하거나 고민하면 안 되겠지, 어쨌든 자신의 마지막 날까지, 제대로 살아가면 좋은 걸까, 반드시...…같은 느낌으로. 동시에 사람은 단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무언가 새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라는 것도 재차 깨달았습니다. 물론 좋은 영향도 있고 나쁜 영향도 있다. 그러면, 자신이 살아 있는 한은, 자신과 조금이라도 관계하고 있는 주위의 사람에게, 뭐든지 좋으니까, 좋은 영향을 조금이라도 줄 수 있으면 좋다. 그게 제대로 살고, 잘 산다는 건가, 라고.

 아버지 암에 바삭 달라붙어 있다 보니 정말 평소에 생각하지 않는 생각을 했거든요. 누군가의 죽음에 직면하지 않으면, 인간이란, 진짜의 의미에서는 깨닫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군요.

03 役割 分担を決めて、家族全員の「プロジェクト」に

父のがんはわかった時点で「ステージIV」、手術もできない状態でした。 つまり、治療によって回復する道がほぼ断たれていた。 父以上に、家族がその現実の重さにどう対応すればいいのか、最初は戸惑っていました。 けれども、淡々とエンディングノートを記し、自らは気弱な顔を見せない父を前に、 私たち家族も次第にどうすればいいのかが、おのずと見えてきました。 家族それぞれが役割分担をして、行動面でも、精神面でも父の「日常」をサポートしよう、と。

 私たち家族が、なによりも優先しようと思ったのは、父が何を求めていて、どうすると一番心地いいだろうか、ということについて、なるべくきめ細かく目配せすることでした。

 幸いなことに、父は、抗がん剤治療が始まってからも、日常生活はあまり変わらずに送ることができました。そうなると、治療以上に、普通の日常をどうやったら穏やかに楽しく暮らせるだろうか、ということが、とっても大切になってきます。ごくごく平凡な生活をゆったり送れるように、自然にサポートしていこう、というのが家族の間での暗黙の了解になっていましたね。

 父の前では悲しそうにしない、というのも家族の間で自覚してやっていたことですね。もちろん、無理やり明るく振る舞うとかえって不自然ですし、かといって、ふとひとりになると、やっぱり暗くなってしまうので、「普通に明るくしている」のは、けっこう難しいところもありました。実際には、考えること以上に、毎日やらなきゃいけないことがたくさんあったので、実務を淡々とこなしていることで、なんとかやり過ごしていた部分はあると思うのですが。

 それから家族間で、メールを使って、治療方法やその他いろいろな情報を共有することは頻繁になりました。

 例えば主治医の先生のところに話を聞きに行ったら、そのとき聞いた内容を帰ってから父自らテキストに起こしてメーリングリストに流したりもするわけです。まるで会議の議事録みたいだなぁと思ったりもしたんですが。

 もちろん、兄弟の間で、父への接し方や、治療に対する考え方で、ぎくしゃくしたり、ぶつかったり、けんかになったことも、あります。それぞれ性格も考え方も違いますから。

 特に、がん治療が始まった頃は、私たちの方針もひとつに固まっていませんでしたから、お互いの流儀に不満をもつこともありました。 

 姉とは一度、争いをしましたね。

 私は、父のがんについて知らないことがあるのが嫌だったので、とにかくいろいろな方法で情報を収集して、頭にたたき込んで、お医者さまとも相談をちゃんとして、具体的な治療でよりよい結果を出せないか模索していたんです。

 一方、姉はというと、情報とロジックとで詰めていく私と正反対の性格で、もっとのんびりしているというか、父へのサポートも、理詰めじゃなくて気持ちでやる。優しい声をかけて、小まめに面倒をみるというタイプだった。

 いま思えばどっちのサポートも必要なんですけど、あのときの私は、姉があんまりがんの治療に関する知識や情報を吸収しようとしないのが、どこか不満だったんです。薬や治療の専門用語を、全然知らなかったりして。

 で、あるとき、私と姉とで主治医の先生に話を聞きに行った帰り、その点で口論になったんですね。

 私が姉に対して、お父さんの病気のこと真剣に捉えてないんじゃないか? と。姉は姉で、自分はこれだけ心配してるのにどうしてそんなふうに言うのか、と。

 でもそこでお互いがお互いの感情をぶつけあったことで、自分たちがどういう風に父の病気や残された時間を捉えているか、はじめて理解できた部分が大きかった。

 がんになった本人を家族がどのように支えていくのかは、本当に人それぞれだと思うんです。正解はない。サポートの仕方も、それぞれの性格と、それぞれの得意分野を中心にやるのが、お互いストレスもたまらないし、むしろ積極的に向かい合える。

 そういう部分がわかってからは、姉や兄や母と、自然に役割分担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んです。兄弟がいちばん結束したのも、そのときからだった気がします。

3. 역할 분담을 정하여 가족 전원의 「프로젝트」로

아버지의 암은 알다시피 "4기",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즉, 치료에 의해서 회복하는 길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 이상으로, 가족이 그 현실의 무게에 어떻게 대응할지, 처음엔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담담하게 엔딩노트를 쓰고, 자신은 허약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앞에 두고, 우리들 가족도 점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 보였습니다. 가족 각각이 역할 분담을 하고, 행동면에서도, 정신면에서도 아버지의 "일상"을 지원하자, 라고.

우리들 가족이 무엇보다도 우선시하려고 생각한 것은, 아버지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가장 기분이 좋으실까, 라는 것에 대해서, 가능한 한 세심하게 배려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는 항암제 치료가 시작되고 나서도 일상생활은 거의 변함없이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치료 이상으로, 보통의 일상을 어떻게 하면 온화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됩니다. 극히 평범한 생활을 느긋하게 보낼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지원해 나가자는 것이 가족 간의 암묵적인 양해가 되어 있었지요.

 아버지 앞에서는 슬퍼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도 가족 간에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네요. 물론, 무리해서 밝은 척 행동하면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그렇다고 해서, 문득 혼자가 되면, 역시 어두워지기 때문에, 「보통 밝게 하고 있다」는 것은, 꽤 어려운 점도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매일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실무를 담담하게 행하고 있는 것으로, 어떻게든 지나가고 있던 부분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리고 가족 간에도 메일을 이용해서 치료방법이나 기타 여러 가지 정보를 공유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예를 들어 주치의 선생님께 이야기를 들으러 가면, 그 때 들었던 내용을 돌아와서 아버지 스스로 문장으로 만들어 메일링 목록에 올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치 회의의 의사록인 것 같기도 한데.

 물론 형제간에 아버지를 대하는 법이나 치료에 대한 사고방식에서 삐걱거리거나 부딪치거나 싸움을 건 적도 있습니다. 제각기 성격도 생각이 다르니까요.

 특히 암 치료가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우리 방침이 하나도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의 방식에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언니와는 한번 싸웠네요.

 나는 아버지의 암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으면 싫었기 때문에, 어쨌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보를 수집하여, 머리에 주입하고, 의사와도 상담을 제대로 하고, 구체적인 치료로 보다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는지를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언니라는 사람은 정보랑 논리적으로만 채워가는 나와 정반대의 성격으로, 좀 더 느긋하게 대하고 있다든가, 아버지에게의 지원도 이론으로 따져 나가지 않고 마음으로 한다. 부드러운 말을 걸고, 세밀하게 돌봐주는 유형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느 쪽의 지원도 필요했는데, 그때의 저는 언니가 너무 암의 치료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를 흡수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어딘지 불만이었습니다. 약이나 치료의 전문용어를 전혀 모르고 있고.

 그리고 어느 날 저와 언니랑 같이 주치의 선생님께 이야기를 들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점으로 말다툼을 벌였지요.

 내가 언니에 대해서, 아빠의 병을 진지하게 파악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라고. 언니는 언니대로, 자신은 이것만 걱정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라고.

 그렇지만 거기서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서로 부딪침으로써, 스스로가 어떤 식으로 아버지의 병이나 남겨진 시간을 파악하고 있는지, 처음으로 이해했던 부분이 컸다.

 암에 걸린 본인을 가족이 어떻게 떠받쳐나가는지는 정말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것 같아요. 정답은 없다. 지원의 방법도, 각각의 성격과 각각의 특기 분야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서로 스트레스도 견디기 어렵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마주할 수 있다.

 그런 부분을 알고 나니 언니 오빠 엄마 자연히 역할분담을 할 수 있죠. 형제가 가장 단합한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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