がんとまとめ

がんとくためにりないもの

司會進行

ジャーナリスト 田原総一朗氏

がん患者が「がんと共に働く」社会を実現する。 そのためには、何をすればいいのでしょうか?

がん経験者、がん患者を持った家族、医療従事者、職場、地域の支援者———— がんの「当事者」のみなさんと、この問いに対する答えを探っていきます。

1. 「私たち、がんと共に働いてきました」

田原

今日は「がんと共に働く」をテーマということで、がんを経験された立場、それから家族、地域、職場、医療関係者、それぞれの立場から語っていただこうと思い、集まってもらいました。私も聞きたいことがたくさんあります。

みなさんも、それぞれの立場から「これからがんと共に生きる働ける社会づくりには、どうしたらいいのか」について、経験を踏まえて話してもらえればと思います。

では、自己紹介を兼ねて、ご自身の経験を関原さんから話していただけますか。

関原

私は現在67歳です。もともと日本興業銀行の銀行マンでした。1984年、39歳のときに、赴任先のニューヨークで大腸がんが見つかり、摘出手術を受けました。早期発見でなくリンパ節に多数の転移がありました。そのあとは文字通り「がんと共に働く」人生でした。何度も転移を繰り返したのです。翌年帰国して、2回目以降5回の転移は国立がんセンターで治療してもらいました。

80年代当時、日本ではまだがんの告知は一般的ではなかったのですが、がんにかかったのがアメリカで、あちらでは当人にはっきり告知するので、日本に帰ってからも病院で包み隠さず話してもらうようにしました。職場にも自らがんにかかっていることを伝えました。特別扱いは特にされませんでした。現在は数社の社外役員をしながら、日本対がん協会常務理事を務めています。

児玉

私は、新聞社で働いています。2006年に検診で乳がんが見つかりました。44歳のときです。手術を受けた後、仕事をしながら30回の放射線照射を受けました。仕事は結構きついのですが、マスコミの職場は勤務時間などわりあいと自由度が高いので、助かりました。実は同時期に社内に複数のがん患者がいたのです。

乳がんの人が私を含めて3人、前立腺がんが2人。オープンな会社の雰囲気もあったからでしょう。告知された瞬間から、がんだということは自ら職場でぱーっと話してしまいました。おしゃべりなので、取引先のお客さまにまで話したら思いっきり引かれてしまって、むしろ社外の方のフォローが大変でした。

河村

私は女性特有のがんの患者会「オレンジティ」を立ち上げ、理事長を務めています。きっかけは自らのがん体験です。1999年に32歳で結婚して、その1週間後に子宮がんだとわかりました。最近ちょっと生理が重いからと近くの病院に行って、内診しているカーテンの向こうで、「あ、こりゃがんだなー」と言われてしまったんです。図らずも告知されてしまったわけですね。

新婚ほやほやでがんになって、相手に申し訳なく思い、親からは「離婚しなさい」と言われましたが、夫は一貫して態度が変わらず、「いまはがんも治る時代だから」と励ましてくれ、私の支えになりました。勤め先は県庁で、手術後は後遺症に苦しみましたが、長く休むとなんだか居場所がなくなるようなあせりがあって、早期に復職しました。

渡邉

私は看護師で、神奈川県立がんセンターで働いています。10年前、外来の看護師長をしていた頃、いろいろな方からがんについて相談を受けたのをきっかけに、がん看護専門看護師の資格を取りました。それから、誰もがそこに行けば何とかなる場所を作りたいと思って、病院内に相談部門を立ち上げました。相談者の中には、ときどき、会社にはがんになったと言えないので有給休暇で療養するという方がいらっしゃいます。一般的には、職場ではがんだと言えない環境が、まだまだあるのだと思います。

いまは看護の管理者ですが、私の職場にもがんを抱えながら、仕事をしている人がいます。私は一番配慮しなければいけない立場ですので、週に何回だったら働けるか、何時間だったら大丈夫かということを聞きながら、調整しているつもりです。

암과 함께 일한다.~ 정리 편

암과 함께 일하기에 부족한 것.

사회진행

언론인 타하라 소이치로 씨

좌담회 참석자

. 일본 암 협회 상무이사/낙천은행 사외임원 / 세키하라 타케오 시

. 비영리법인 오렌지 시티 이사장/시즈오카 현청 / 가와무라 유미 씨

. 지방 독립행정법인 카나카와 현립 암센터 간호국장 암 전문 간호사/

와타나베 신리 씨

. 일본경제신문사 글로벌 사업국 차장 / 코타마 노리코 씨

. 국립암연구센터 이사장 / 홋타 토모미츠 씨

. 국립암연구센터 암 대책 정보센터장 / 와카오 후미히코 씨

암 환자가 "암과 함께 일하는" 사회를 실현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암경험자, 암환자가 있는 가족, 의료종사자, 직장, 지역의 지원자, 암 '당사자' 여러분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갑니다.

1. 우리는 암과 더불어 일해 왔습니다.

타하라

오늘은 "암과 함께 일한다."를 주제로 하여, 암을 경험한 입장, 그리고 가족, 지역, 직장, 의료 관계자, 각각의 입장에서 말해 주시려고 모였습니다. 저도 궁금한 게 너무 많아요.

여러분도, 각각의 입장에서 "앞으로 암과 함께 살며 일할 수 있는 사회 만들기에는,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에 대해서, 경험을 근거로 이야기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자기소개를 겸해서 자신의 경험을 세키하라 씨께 전해주시겠습니까?

세키하라

저는 현재 67살입니다. 원래 일본흥업은행 은행원이었습니다. 1984년, 39세 때에, 부임처의 뉴욕에서 대장암이 발견되어, 적출 수술을 받았습니다. 조기 발견이 아닌 림프절에 다수의 전이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은 문자 그대로 '암과 함께 일하는' 인생이었습니다. 몇 번이고 전이를 반복했습니다. 다음 해 귀국해, 두 번째 이후 다섯 번의 전이는 국립 암센터에서 치료 받았습니다.

80년대 당시, 일본에서는 아직 암의 고지는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만, 암에 걸린 것이 미국에서, 저쪽에서는 당사자에게 확실히 고지하기 때문에, 일본에 돌아와서도 병원에서 숨김없이 이야기를 듣게 했습니다. 직장에도 스스로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특별 취급은 특별히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는 몇 개의 사외 임원을 하면서, 일본 대암 협회 상무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코타마

저는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2006년에 검진에서 유방암이 발견되었습니다. 44살 때입니다. 수술을 받은 후 일을 하면서 30번의 방사선 조사를 받았어요. 일은 꽤 힘들지만, 매스컴의 직장은 근무시간 등 비교적 자유도가 높아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실은 같은 시기에 사내에 복수의 암 환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카와무라

나는 여성 특유의 암의 환자 회 "오렌지 티"를 만들어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계기는 자신의 암 체험입니다. 1999년에 32세에 결혼하고, 그 일주일 후에 자궁암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생리가 좀 무겁다고 인근 병원에 가서, 내진하고 있는 커튼 너머에서, '아, 이건 암이구나' 하고 누군가가 말해 버렸어요. 뜻밖에 고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결혼은 하자마자 바로 암에 걸려, 남편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부모로부터는 "이혼해라"라는 말을 들었지만, 남편은 일관해서 태도가 변하지 않고, "지금은 암도 치료하는 시대이니까"이라고 격려해 줘, 나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근무처는 현청으로, 수술 후 후유증에 힘들었습니다만, 장기간 쉬어도 뭔가 있을 곳이 없어진 것 같은 조바심이 있어, 조기에 복직했습니다.

와타나베

저는 간호사이고, 카나가와 현립 암센터에서 일해요. 10년 전, 외래 간호사장을 하고 있을 무렵, 여러 분으로부터 암에 대해 상담을 받은 것을 계기로, 암 간호 전문 간호사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가 거기에 가면 어떻게든 될 장소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해 병원 내에 상담 부문을 창설했습니다. 상담자 중에는, 가끔 회사에는 암에 걸렸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유급 휴가로 요양한다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일반적으로는, 직장에서는 암이라고 말할 수 없는 환경이, 아직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간호 관리자입니다만, 제 직장에도 암을 안고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가장 배려를 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일주일에 몇 번이면 일을 할 수 있는지, 몇 시간이면 괜찮은지를 물으면서 조정하고 있습니다.

2. 「『なぜ教えてくれないの! 余命半年なら精いっぱい生きたい』と女房に怒られました」

田原

私は2人の女房を乳がんで亡くしました。最初の女房は、自分でしこりを発見して病院に行ったら、非常に早期のがんということで、手術を受けました。3年後に再発して、医師に「これからは好きなものを食べて自由に旅行しなさい。そうすると免疫力が上がるから」と言われました。要するに見放されちゃったんですね。

それで別の病院に行って手術を受けたところ、執刀医の外科部長が、説明に来ないんです。説明できない状況だったようです。代わりに若い医師が来て、何だか訳の分からない説明をしていきました。

どちらの病院も頼りにならない。もうわらにもすがる思いで、放射線治療や当時話題だった丸山ワクチンも使ってみました。最後に女房は宗教にまで頼りました。それから数年後の1984年、亡くなりました。闘病生活9年、53歳でした。

その後再婚した2人目の女房もがんにかかりました。1998年になんだかおっぱいが腫れているといって、病院に行ったんですね。そうしたら炎症性乳がんという珍しい悪性のがんで、半年もたない、と告げられました、私だけに。主治医からは「余命半年と本人に告げれば生きる気力をなくします」と言われて、院長と3人で相談して、女房には、乳がんであることは話したものの、より深刻な炎症性乳がんという病名は隠すことにしました。

薬でがんを小さくすることができたら手術も可能になるかも、ということで、入院して薬を注射してもらったけれど、2ヵ月経っても小さくなりません。いちかばちかで放射線を照射してみたら、小さくなったので、3ヵ月後に手術しました。それでも、余命半年に変わりはない、とのことでした。

さすがに女房もこれはおかしいと思ったようでした。乳がんならばさっさと手術で切ってしまうはずなのに、薬ばかり投与する。ついに、娘にパソコンを病室に持って来させて自分で調べて、炎症性乳がん、ということがばれてしまいました。

「あなた、ひどいじゃないの! なぜ隠してたの!」

女房は大激怒です。

「あと半年の命であればこそ、一日一日を精いっぱい生きたい。だからきちんと話してほしかったのに」

ひとこともありません。

こんな病院は信用できない、と女房はそのまま退院してしまい、手術の傷の手当てをしてもらった近所のクリニックで、聖路加国際病院(当時)の中村清吾医師を紹介してもらいました。

中村さんは、本当にいい医者でした。「医者自身に病気の真実はわからない。常に患者に学ぶしかない」と言って、患者の話をいくらでも聞いてくれるんです。真剣に話を聞いてもらえるのは、女房の免疫力をすごく高めてくれたと思います。その後、いろいろな抗がん剤を使って、発病から約6年後の2004年、67歳で亡くなりました。

女房ががんになったことで、私はがんの問題に関わるようになりました。いまは中村医師を中心に作った日本乳がん情報ネットワークというNPOの代表理事をやっています。

2. 「『왜 알려주지 않는 거야? 남은 수명이 반년이면 힘껏 살고 싶어』라고 마누라가 화를 냈습니다.」

타하라

나는 두 명의 아내를 유방암으로 잃었습니다. 첫 번째 아내는 스스로 응어리를 발견하고 병원에 갔더니, 아주 조기 암이라고 해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3년 뒤 재발하여 의사가 「앞으로 좋아하는 것을 먹고 자유롭게 여행하라. 그러면 면역력이 올라가니까」라고 했습니다. 요컨대, 방관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다른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았더니 집도의 외과 부장이 설명을 하러 오지 않아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대신 젊은 의사가 와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설명을 하고 갔어요.

어느 병원도 미덥지 않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방사선치료나 당시 화제가 되었던 마루야마 백신도 사용해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내는 종교에까지 의지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8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투병생활 9년, 53세였습니다.

그 후 재혼한 두 번째 아내도 암에 걸렸습니다. 1998년에 왠지 젖이 부었다고 해서 병원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염증성 유방암이라는 희귀한 악성 암으로 반년도 안 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치의는 「남은 수명이 반년이라고 본인에게 고하면 살 기력을 잃게 됩니다.」라고 하여 원장과 3명이 상담하고, 마누라에게는 유방암인 것은 이야기했지만, 보다 심각한 염증성 유방암이라는 병명은 숨기기로 했습니다.

약으로 암을 작게 만들 수 있으면 수술도 가능해질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입원해 약을 주사로 맞았지만, 2개월이 지나도 작아지지 않았습니다. 요행수를 바라고 방사선을 조사해보다가 작아져서 3개월 후에 수술했어요. 그래도 남은 수명 반년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아내도 이건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유방암이라면 즉시 수술로 잘라버려야 할 텐데, 약만 투여한다. 결국엔 딸에게 컴퓨터를 병실로 가져오게 해 스스로 조사하고, 염증성 유방암이라는 것이 들통이 나버렸습니다.

"당신, 심한 거 아니에요? 왜 숨겼어요?"

아내는 크게 노발대발했습니다요.

「남은 수명이 반년이니까 더욱, 하루하루를 힘껏 열심히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숨기다니.」

할 말이 하나도 없었어요.

이런 병원은 믿을 수 없다고 아내는 그대로 퇴원해 버려, 수술의 상처 치료를 받은 근처의 클리닉으로부터, 성루가 국제 병원(당시)의 나카무라 세이고 박사를 소개 받았습니다.

나카무라 씨는 정말 좋은 의사였습니다. 「의사 자신도 병의 진실은 모른다. 늘 환자에게 배우는 수밖에 없다」며 환자 얘기를 얼마든지 들어주십니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아내의 면역력을 대단히 높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여러 가지 항암제를 사용해서, 발병으로부터 약 6년 후인 2004년, 67세에 사망했습니다.

아내가 암에 걸리면서 나는 암의 문제들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나카무라 박사를 중심으로 만든 일본 유방암 정보 네트워크라고 하는 NPO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3. 「医者に、がんです、と言われたらどうすればいい?」

田原

私が2人の女房をがんで亡くしたことは、あちこちに書かれています。以来、1日に10本 以上、相談の電話がかかってきます。

で、地方の方からこんな相談がありました。

「病院に行ったら乳がんだと言われたけれど、いったいどうすればいいでしょう」

普通の人は、都会に住んでいても、がんになったとき、どの病院に行ったらいいかわからない。ましてや地方だと医療機関も限られています。私の女房のときはどちらも知人のつてで大病院にかかりましたが、いろいろあって、2人とも転々と転院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普通の人が、地方の人が、がんになったとき、いったいどこに相談すれば、適切な病院、適切なお医者さんに出会えるんでしょう?

堀田

ここ、国立がん研究センターの中に、がん対策情報センターがあり、今日出席している若尾がセンター長を務めています。がん対策情報センターでは全国のがん診療施設の情報を集めて提供しています。

田原

でも、ここは東京のど真ん中、築地ですよね。全国に同じようなセンターはあるんですか? 北海道のなになに村や沖縄のどこそこ村でがんになった人は、いったいどこに行けばいいんです?

若尾

情報センターは東京にひとつですが、全国に現在397カ所(2013年2月現在)のがん診療連携拠点病院があります。そこには相談支援センターという、その病院にかかっていない方も相談できる窓口があって、電話での相談も受け付けています。それから、がん対策情報センターに「患者必携サポートセンター」というのがあって、全国統一の電話番号で相談をお受けしています。ここに電話していただければ、その地域の相談支援センターや拠点病院を紹介しています。

田原

なるほど。ただ、東京でもそうですけど、地方の病院では、病院やお医者さんによって治療レベルの高い低いがどうしたってありますよね。誰だって最高のところで治療を受けたい。いい病院はどこにあるの、いいお医者さんはどこにいるの、というのはわかるんですか?

堀田

相談支援センターに相談すれば、どの専門だったらどこの病院がやっていますとか、手術成績を公表している病院なら、こういうデータがありますということは、教えてもらえます。

若尾

いまは、胃がんや大腸がんなど数が多いがんであれば、どこの病院に行ってもそれほど治療の差はありません。数の少ないがんや進行が進んでいるがんのように治療難易度が高い状態では、都市部の専門医がいる病院に行ったほうがいいケースもあります。ただ、がん治療の水準は全国的に上がっていますので、全ての方が必ずしも都市部の大病院に行かなくてもいい状況にはなりつつあります。

関原

アメリカの対がん協会は、全部で280人の相談員を抱えていて、常時100人の方が24時間相談を受け付けています。日本は、各病院に相談窓口があるけれど、そこで病院の悪口は言えませんよね。でも、本当は忌憚(きたん)のない意見を患者サイドが話せるようにならなければ、医療は進歩しない。そのためには匿名で電話相談できるようにするのがいい。

私は2006年に日本対がん協会に、「がん相談ホットライン」というコールセンターを作りました。15人の相談員が、1年に1万人ぐらいの相談を受けています。どの病院のどの先生がいいというようなことは言いませんが、その地域では、乳がんではここの病院が一番手術の実績が多いとか、化学療法が多いといった公表されている情報を中心に紹介をします。

田原

コールセンターの運営資金はどうしているんですか?

関原

企業などを回って寄付を募っています。企業の人には、「社会的意義に加えて、あなたの会社の従業員は、会社にがんを患っていることを知られたくないから、人事部に相談になんてなかなか出向けません。こういう窓口があるから、何かあったらそこへ電話しなさいと、社員に宣伝するといい。そういうふうに使ってください」と説明して、寄付してもらっています。

3. 「의사가 암입니다. 라고 하면 어쩌지?」

타하라

내가 두 아내를 암으로 잃은 것은 여기저기 기사로 쓰여 졌습니다. 그 후 하루에 10통 이상, 상담전화가 걸려옵니다.

그리하여, 지방 사람으로부터 이런 상담을 받았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유방암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

보통 사람은 도시에 살고 있어도 암에 걸렸을 때 어느 병원에 가야할지 모른다. 하물며 지방이라면 의료 기관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내 아내의 경우에는 두 사람 다 아는 사람의 연고로 큰 병원이 걸렸습니다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병원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지방 사람이 암에 걸렸을 때 대체 어디에 상담하면 적절한 병원, 적절한 의사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홋타

여기 국립 암 연구센터 내에 암 대책 정보센터가 있어, 오늘 출석한 와카오 씨가 센터-장을 맡고 있습니다.

타하라

근데 이곳은 도쿄 한 복판에 세워진 곳이지요. 전국에 같은 센터가 있나요? 홋카이도의 무슨 마을이나 오키나와의 무슨 마을에서 암에 걸린 사람은 도대체 어디로 가면 되는 겁니까?

와카오

정보 센터는 도쿄에 하나입니다만, 전국에 현재 397개소(2013년 2월 현재)의 암 진료 제휴 거점 병원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상담 지원 센터라고 하는, 그 병원에 관계되지 않은 분도 상담할 수 있는 창구가 있어, 전화 상담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암 대책 정보 센터에 "환자가 반드시 휴대해야 하는 지원 센터정보"라는 것이 있어, 전국 통일의 전화번호로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 전화하시면, 그 지역의 상담 지원 센터나 거점 병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타하라

그렇군요. 다만, 동경에서도 그렇습니다만, 지방의 병원에서는, 병원이나 의사에 따라 치료 수준이 높고 낮음이 어떻게 해도 있겠지요. 누구라도 최고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싶어 하지요. 좋은 병원은 어디에 있는지, 좋은 의사는 어디에 있는지? 라는 것은 알기나 합니까?

홋타

상담 지원 센터에 상담하면, 어느 분야 전문이라면 어느 병원이 하고 있다든가, 수술 성적을 공표하고 있는 병원이라면, 이런 데이터가 있다는 것은,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와카오

지금은, 위암이나 대장암 등, 환자수가 많은 암이라면, 어느 병원에 가도 그다지 치료의 차이는 없습니다. 이환수가 적은 암이나 진행이 되고 있는 암과 같이 치료 난이도가 높은 상태에서는, 도시의 전문의가 있는 병원에 가는 것이 좋은 케이스도 있습니다. 단지 암 치료의 수준은 전국적으로 오르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반드시 도시의 큰 병원에 가지 않아도 좋은 상황은 되고 있습니다.

세키하라

미국의 암 협회는, 전부 280명의 상담원을 보유하고 있어 상시 100명이 24시간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은 각 병원에 상담 창구가 있는데 그곳에서 병원의 험담은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사실은 기탄없는 의견을 환자 측이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으면 의료는 진보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익명으로 전화 상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저는 2006년에 일본 암 협회에, "암 상담 핫라인"이라고 하는 콜 센터를 만들었습니다. 15명의 상담원이 1년에 1만 명 정도의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 병원의 어느 선생님이 좋다고 하는 것은 말하지 않습니다만, 그 지역에서는, 유방암에서는 이곳의 병원이 가장 수술의 실적이 많다든가, 화학 요법이 많다고 하는 공표되고 있는 정보를 중심으로 소개를 합니다.

타하라

콜센터의 운영 자금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세키하라

기업 등을 돌아 기부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사람에게는, 「사회적 의의에 더해, 당신의 회사의 종업원은, 회사에 암을 앓고 있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인사부에 상담에는 좀처럼 나가지 않습니다. 이런 창구가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거기에 전화하라고 사원에게 선전하면 좋다. 그러한 식으로 사용해 주세요.」라고 설명하고, 기부를 받고 있습니다.

4. 「食道がん、いまは手術しない選択肢もあるんですね」

田原

国立がん研究センターの専門家の方がいらっしゃるので、ひとつ聞いておきたいんですが、がんになったら、内科と外科と、どちらに先にかかったほうがいいですか?

堀田

診断をつけるという意味では、内科で全身を診て、それによってどうするという判断になると思います。

田原

最初は内科に行ったほうがいいということですか?

堀田

まあそのほうがいい場合が多いんじゃないでしょうか。ただ、乳がんの場合のようにはっきりと外に見えるものなら、外科に直接行かれる方が多いですね。

田原

そうですか。どうしてこんな質問をするかというと、内科に行くとどうしても抗がん剤で、外科に行くと手術ですよね。行った先によって、治療法が異なる。これ、おかしくないですか? ベストな治療法が外科か内科かで違うだなんて。

若尾

少し前まではそういうこともあったのですが、いまは病院内で十分にコミュニケーションを取って、その患者さんにとってどんな治療法が一番いいかを検討するようになっています。

堀田

がんセンターや総合病院では、内科と外科とで、いつも合同カンファレンスをやっています。

田原

いまはそれが普通なんですか?

若尾

ここ10年ほどで、拠点病院などでは、内科と外科など異なる専門の医師が合同で患者さんの治療方針について検討するキャンサーボードという検討会が行われるようになってきています。最近では、看護師や薬剤師など多くの職種もキャンサーボードに参加し、多職種で一緒に考えるチーム医療をやるようになってきています。

田原

実は私の甥が食道がんになったんですが、結局、手術をしなくても十分な効果がある抗がん剤だけで対応したんですね。食道がんって、いまは手術しない選択肢もあるんですね。

若尾

そうですね。最近では、手術の代わりに、化学療法と放射線を組み合わせた治療が選択されることが増えてきています。その治療方針も、外科だけ、内科だけではなく、チームで検討して決めるようになってきています。

田原

なるほど。いまの病院では、内科か外科か、最初にどっちに行ったほうがいいか、ではなくて、両方の治療法を検討してくれるわけですね。

関原

がん医療は格段によくなりました。私ががんになった80年代中頃は、固形がんに効く抗がん剤はほとんどなくて、手術ができるかできないかで運命が決定していました。また当時日本の病院には予約制度がなくて、通院は半日がかりでした。朝6時頃に順番札を取りに行って、3時間待って、診察が終わるのがやっと11時頃です。

アメリカは完全予約制だったので、日本の病院はいったいどうなっているんだろうと思いました。入院しないと検査も治療も受けられなくて、入院期間も長かったです。いまはどんな病院でも予約制だし、術前の検査や化学療法を外来で受けられます。仕事をしながら、治療を受けやすくなりました。

児玉

私の場合は、会社がメディアということもあって、始業が遅いので、朝の8時半に予約を取ると、治療を受けてからでも仕事に間に合います。それから乳腺外科と放射線科の先生が2人ともやさしくて、何かあったらすぐに携帯に連絡してくださ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個人的には、インターネットがあったので、記録代わりにブログをつけていたのも役立ちました。

田原

情報収集に使いましたか、インターネット。

児玉

いや、それはやりませんでした。インターネットにはいろいろな情報があふれすぎて、ノイズがあまりに多いのです。だから情報収集には使いませんでした。

河村

告知方法もこの10年で変わってきていますよね。田原さんの2番目の奥さまと時代はそれほど違いませんが、私の場合、インフォームドコンセントは、すごくよかったですよ。手術をする前に、夫と2人で、この先、多分セックスをするときに問題が出るだろう、排尿障害とか排便障害、リンパ浮腫といった後遺症が出るだろうという話をていねいにしてもらいました。私は本当に気が動転していて、ほとんど頭に残っていなかったのですが、夫が一緒に聞いてくれていたので、助かりました。

4. 「식도암, 지금은 수술 안할 선택사항도 있네요.」

타하라

국립 암 연구센터의 전문가가 계시니까 한 가지 물어 보고 싶습니다만 암에 걸리면 내과와 외과 중 어느 쪽에 먼저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홋타

진단을 내린다는 의미에서는 내과에서 전신을 진찰하고 그것에 의해 어떻게 한다는 판단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타하라

처음에는 내과로 가는 것이 좋단 말인가요?

홋타

음, 그게 더 좋은 경우가 많잖아요. 다만 유방암의 경우처럼 분명히 밖으로 보이는 것이라면 외과에 직접 가는 게 더 많지요.

타하라

그래요? 왜 이런 질문을 하냐고 하면, 내과에 가면 아무래도 항암제이고 외과에 가면 수술이 되죠. 가는 곳에 따라 치료법이 다르다. 이것 이상하지 않아요? 최고의 치료법이 외과냐 내과냐에 따라 다르다니.

와카오

얼마 전까지는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병원 내에서 충분히 의사소통을 하여, 그 환자에게 있어서 어떤 치료법이 제일 좋은지를 검토하게 되어 있습니다.

홋타

암센터나 종합병원에서는, 내과와 외과에서, 언제나 합동 컨퍼런스를 하고 있습니다.

타하라

지금은 그게 보통인가요?

와카오

최근 10년 정도에, 거점 병원 등에서는, 내과와 외과 등 다른 전문의 의사가 합동으로 환자의 치료 방침에 대해 검토하는 암 위원회 (cancer board)라고 하는 검토회가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간호사나 약제사 등 많은 직종도 캔서 보드에 참가해, 여러 직종이 함께 생각하는 팀 의료를 하도록 되고 있습니다.

타하라

사실 제 조카가 식도암에 걸렸는데, 결국 수술을 안 해도 충분한 효과가 있는 항암제로만 대응했지요. 식도암은, 지금은 수술하지 않는 선택사항도 있습니다.

와카오

글쎄요. 요즘은 수술 대신 화학요법과 방사선을 조합한 치료가 선택되는 일이 늘고 있어요. 그 치료 방침도, 외과만, 내과만이 아니고, 팀에서 검토해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타하라

그렇군요. 지금의 병원에서는 내과인지 외과인지 처음에 어느 쪽으로 가는 것이 좋은지 아닌, 양쪽의 치료법을 검토해 주는 것이군요.

세키하라

암 의료는 현격히 좋아졌습니다."내가 암에 걸렸던 80년대 중반만 해도, 고형 암에 듣는 항암제는 거의 없고, 수술을 할 수 있을까 말까 해서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일본 병원에는 예약제도가 없어서, 통원은 반나절 정도였지요. 아침 6시경에 차례표를 받으러 가서, 3시간 기다려서 진찰이 끝나는 것이 겨우 11시경입니다.

미국은 완전 예약제였기 때문에 일본 병원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입원하지 않으면 검사도 치료도 받을 수 없고, 입원 기간도 길었습니다. 지금은 어떤 병원이든 예약제로는 수술 전 검사나 화학 요법을 외래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일을 하면서 치료를 받기 쉬워졌어요.

코타마

제 경우는, 회사가 미디어라고 하는 특성도 있어, 업ㅁ무 시작이 늦기 때문에, 아침 8시 반에 예약을 잡으면, 치료를 받고 나서라도 일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유선乳腺(젖샘)외과와 방사선과 선생님 두 분 다 상냥해서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휴대폰으로 연락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인터넷이 있어 기록 대신 블로그를 켜고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타하라

정보 수집에 사용했나요, 인터넷.

코타마

아니, 그건 안 했어요. 인터넷에는 여러 가지 정보가 넘치고, 노이즈가 너무나 많죠. 그래서 정보수집에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카와무라

고지 방법도 지난 10년 사이에 바뀌었죠. 타하라 씨의 두 번째 부인과는 시대는 그다지 다르지 않지만, 저의 경우, 사전의료의향서는 굉장히 좋았답니다. 수술 전에 남편과 2명이서 앞으로 섹스 할 때 문제가 있을 것, 배뇨장애나 배변장애, 림프부종 같은 후유증이 생길 거라는 이야기를 정성스레 들었습니다. 전 정말 어찌할 바를 몰라서 거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 남편이 같이 들어주어서 도움이 되었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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